태극기 역사
태극 태극기 태극기 역사
태극기의 역사
1. 태극기 제작에 관한 역사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사용된 최초의 조선국기
오늘날 우리나라가 사용하고 있는 태극기는 조선말기 고종임금때 만들어졌다. 당시 우리나라 정세는 매우 복잡하고 불안한 상태였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청일의 대립과 러시아의 남하정책, 서구열강들의 개항요구 등에 맞물려 조선은 몹시 불안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대원군 10년 쇄국정책이 끝나고 개화파들이 득세하면서 우리나라도 세계정세의 변동에 따라 쇄국을 버리고 세계각국과 통상을 하고 문호를 개방해야한다는 의견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마침내 1876년 윤요호 사건을 개기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부산, 원산, 인천의 세 항구가 차례로 개항되었다. 이러한 일본세력의 침투에 불안을 느낀 청나라의 리홍장은 일본을 견제하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대비하기 위해 조선국에 서양의 여러나라와 수호통상을 주선해왔다.
그리하여 조선은 1882년 5월 미국과 국교를 맺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다. 이 조약은 다른 조약에 비해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국가간의 쌍무적 협약을 맺게 되었다. 이때 미국의 전권특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은 조선 대표 김홍집에게 독립국가로서 국기를 제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고, 이응준에 의해 제작된 조선국기가 미국의 성조기와 함께 나라히 게양된 가운데 조미통상조약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게양된 조선국기는 전하지 않으므로 어떤 모양인지 알수가 없다. 그런데 조미통상조약을 마치고 돌아간 슈펠트 제독에 의해 미국해군부 항해국에 조선국기가 전달되었고, 이것이 1882년 간행된 《해상국가들의 깃발들》이라는 책에 실리게 되는데, 뚜렷한 태극기 모양이 나타나 있다.

1882년 간행된 《해상국가들의 깃발들》이라는 책에 실린 태극기
그러나 김홍집이 당시상황을 기록한 〈청국문답 淸國問答〉에 의하면 이응준이 제작한 조선국기는 위의 태극기 모양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슈펠트는 어떻게 미국으로 태극기를 가지고 가게된 것일까?
김홍집의 〈청국문답 淸國問答〉을 통해 알아본 태극기 역사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미조약이 체결된 후 마젠중은 청나라 함선인 위원호(威遠號)로 조선의 전권부관 김홍집(金弘集), 종사관 서상우(徐相雨), 홍로4품(紅爐4品) 이응준(李應浚), 그리고 조선특파미국전권특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 등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김홍집과 마젠중 사이에 조선국기에 대한 필담이 오고 갔고 그것이 오늘날 〈청국문답 淸國問答〉으로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그 핵심에 이응준이 만든 조선국기와 마젠중이 제시한 조선국기가 있기 때문에 이 둘 간의 관계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 없다.
〈청국문답 淸國問答〉
馬曰 現有一事奉告 貴國不可無國旗 以示遠人 昨李應浚袖至(知)旗式 以與日本相混 貴國旗式究竟何若 前黃參贊謂貴國宜用中國龍旗 以僕觀之 似亦未安(妥)
마젠중 曰 지금 한 가지 고할 일이 있다. 귀국이 외국인에게 제시할 국기가 없다는 것은 불가하다. 지난번 이응준이 손수 보여준 국기 도식은 일본국기와 비슷하여 서로 혼동되니 귀국 국기도식은 어떻게 하겠는가? 황쭌센(黄遵宪)은 귀국이 마땅히 중국의 용기龍旗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또한 타당치 않을 것 같다.
라고 하면서 (* 황쭌센(黃遵憲)의 《조선책략》에 조선국기를 중국의 국기인 용기(龍旗, 황룡기)를 모방하여 흰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이 나는 ‘청운홍룡기(靑雲紅龍旗)’를 만들어 전국에 걸 것을 제안) 마젠중은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귀 국의 기旗는 흰 바탕에 푸른 구름과 붉은 용(靑雲紅龍旗)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직 용은 네 개의 손톱을 사용한 것으로 구획을 암시하였으니 어찌 구별할 수 있겠는가. 단지 네 개의 손톱과 다섯 개의 손톱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다. 푸른 구름이라는 것 역시 구름을 취하느냐 용을 따르느냐로 군신이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이유로 바탕을 백색을 사용한다.
라고 하면서 황쭌센이 말한 ‘청운홍룡기’를 그대로 사용하되 단지 발톱을 5개가 아닌 4개로 하고 구름이 용을 따르는 형태로 하라고 권했다. 김홍집은 조정에 아뢰야한다고 하고 다른 논제로 바꾸었다. 김홍집과 마젠중이 국기 제정에 대해 논의한 5일 후, 5월 27일(음력 4월 11일) 남별궁에서 고별연회가 있었다. 이날 김홍집은 전에 마젠중이 제시한 국기인 ‘흰색 바탕의 청색 구름의 홍색룡기(白底靑雲紅龍旗)’를 거부하면서, 지난번에 이응준이 마젠중에게 보여준 국기를 수정하면 일본국기기와 혼동을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我曰 向論紅龍靑雲 製作須費工 李應浚鑒正本 謂與日本相混 若用紅質中靑白合成圈子 則可免相混否
내가(김홍집) 말하였다. 일찍이 논의된 홍룡・청운기는 만드는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이응준이 제시한 국기 도식이 일본국기와 혼동된다고 하니 이를 수정하여 홍색의 바탕에 청색과 흰색을 합성한 원을 그려 사용함으로서 일본국기와의 혼동을 피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김홍집 수정안 국기’를 통해 볼 때, 앞에서 본 ‘이응준 제작 조선국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이응준 제작 국기’는 흰색 바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김홍집 수정안’에 홍색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중앙의 원은 청색과 홍색을 사용한 청홍태극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김홍집 수정안’에서 중앙에 청색과 백색을 합성한 원을 사용하자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에 홍색은 일장기와 동일하기 때문에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수군조련도나 홍살문 태극문양 등에서 볼수 있듯이 당시 조선에서는 청홍태극이 일반화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응준이 제작한 국기는 흰색 바탕에 청홍태극기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응준이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국기 예상도
흰 바탕 중앙에 둥근 태극모양만 있기 때문에 마젠중이 일본국기와 닮았다고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트집잡아 중국국기를 본딴 청운홍룡기를 만들 것을 제안했으나 김홍집이 이것을 정식으로 거부하면서 ‘이응준 제작 국기’를 변형한 수정안을 제시하자, 마젠중도 더 이상 ‘중국 룡기’를 사용하라고 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3의 안으로 중국 성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던 ‘태극 8괘도’를 조선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시했다.
즉, 마젠중은 조선 사람들이 좋아하는 흰색 바탕에, 중앙에 반홍(半紅)・반흑(半黑)의 태극도를 두고, 바깥 둘레에 조선 8도를 의미하는 순흑색의 8괘를 그리고, 기의 바깥 둘레에 홍색 수로 장식한 국기를 조선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그는 태극 8괘도를 청나라 정부에 알릴 것이며, 또 조선정부에도 알리라고당부하였다.
결국 마젠중은 김홍집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응준이 그린 태극도를 다시 중국식으로 변형시켜 ‘중국식 흑홍 태극 8괘도’를 조선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마젠중이 다시 제안한 중국식 흑홍 태극 8괘도 역시 조선국기로 체택되지 않았다. 1882년 슈펠트 제독이 지니고 간 조선국기는 중국식 태극 8괘도가 아닌 청홍태극을 중심으로 건곤감리 4괘가 그려진 오늘날 태극기와 동일한 국기였다.

마젠중(馬建忠)이 제시한 흑홍태극팔괘기 예상도와 1882년 슈펠트 제독이 미국으로 지니고간 조선국기 스케치 원본이다. 이 원본은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슈펠트 문서 박스에서 발견한 태극기 도안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미 해군에서 간행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에 수록된 태극기의 도안과 거의 일치한다. (사진 출처 이태진 명예교수)
결국 이응준이 제작한 국기는 사용되지 않았고, 김홍집이 제시한 국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마젠중이 제시한 국기 역시 체택되지 않았다. 그런데 슈펠트 제독이 미국으로 가지고간 국기는 완전한 태극기로서 오늘날 사용하는 태극기와 거의 흡사하다. 조약 체결 이후 슈펠트 일행은 5월 26일 중국 상하이를 거쳐 7월 29일 샌프란 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런데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가던 도중 태극기를 제작한 시기는 1882년 9월 25일이다. 슈펠트 제독이 미국에 도착한 시기가 박영효가 태극기를 제작한 시기 보다 약 2개월 앞선다. 그렇다고 이것을 슈펠트 제독이 만들었을리 만무하므로 반드시 이 태극기를 제작하여 슈펠트 일행이 떠날 때 그 그림을 전달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가 바로 최초의 태극기 제작자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 태극기 제작자는 누구인가
현재까지 태극기 제작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이응준(李應俊)설•박영효(朴泳孝)설•고종(高宗)설이다.
앞서 밝힌대로 이응준의 태극기는 이와다른 형태이다. 다음으로 박영효인데 그는 고종으로부터 태극기 제작에 대하여 지시받은바 있다고 《사화기략(私和記略)》이라는 수신사 수기 8월 14일(양력 9월 25일)의 기록에 나와있다.
“새로 만든 국기를 기거하던 숙소 누각에 걸었다. 깃대에 흰색 바탕을 네모지게 펴서 길이(세로)가 폭(가로)의 5분의 2를 넘지 않게 하였다.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하고 네 모서리에 건・곤・감・리의 4괘를 그렸다. 일찍이 상(上)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본국(本國)의 국기를 새로 만드는 일은 이미 처분이 있으셨기에 지금 이미 대기(大旗)・중기(中旗)・소기(小旗) 3본(本)을 만들었는데 그 소기 1본을 올려보내는 연유를 치계(馳啟)합니다.”
이 말은 태극기 제작에 대해 이미 고종의 상세한 지시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본국의 기무처(機務處)에 보고한 글인 《송기무처서》에 태극기 제작에 관하여 기록한 내용을 보면
〈박영효가 미리 준비해 온 태극 팔괘도를 제시하며 영국 영사 애스턴(Aston)에게 국기 제작에 대한 자문을 구하자 애스턴은 각국의 국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인 선장 제임스(James)를 소개해 주었고, 박영효는 제임스로부터 태극 팔괘의 도식은 특별히 색깔이 아름답지만 팔괘의 분포가 조잡하고 불투명해 보이며 각국이 이를 본떠 제작하는 데도 매우 불편하니 사괘만을 사용하되 네 모퉁이에 그려 넣으면 더욱 아름다울 것〉
이라는 조언을 듣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박영효가 일본에 가는 배 안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기술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당시 조선의 수도 한성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 주둔하고 있었고, 청나라는 계속해서 조선의 국기를 청나라의 국기에 준하는 모습으로 만들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종은 청나라의 국기를 따르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고종은 박영효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태극기 제작에 대한 명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청나라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국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마치 처음 국기를 만드는 것처럼 자문을 구하고, 태극기를 제작한 후 각국 사절에게 배포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박영효가 제작했다는 태극기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박영효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던 시기인 1882년 11월 1일 일본 외무성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태극기 그림이 남아있어 이것이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 원형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태극기는 현재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문서에 실려있다. 그리고 박영효과 동행했던 유길준이 그린 태극기가 있어 이것으로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를 유추할 뿐이다.

1882년 11월 1일 일본 외무성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 해리파크스에게 보낸 문서(Fo 228/871)에 남아 있는 태극기 그림과 유길준이 그린 태극기 그림.
그렇다면 슈펠트가 지니고 간 태극기 제작자는 조선국왕 고종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고종(高宗)설은 바로 일본 동경시사신문 기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1882년 10월 2일 자(제179호) 《조선의 유신》이란 기사 내용이다.
지금까지 조선에서는 국기라는 것이 없었는데, 이번 支那(중국)으로부터 來到한 馬建忠이 조선의 국기는 支那 것을 모방하여 삼각형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하였다. .... 국왕은 이를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청국국기를 모방할 수 없다고 거절한 다음 사각형四角形의 옥색玉色 바탕에 태극도太極圖를 청적색靑赤色으로 그리고 기旗의 네 귀퉁이에는 동서남북의 역괘易卦를 붙혀서 이제부터는 조선의 국기로 결정할 것을 하명하셨다고 한다.(명치편년사 권 5 p156)
고종(高宗)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상기 일본 신문기사를 근거로 임오군란시 고종이 태극기를 창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김원모 논문 1992, P65]
그런데 이 기사에서 임오군란때 마젠중이 고종께 용기龍旗를 국기로 사용하라고 강요하였다는 것은 〈청국문답 淸國問答〉의 내용으로 볼 때 맞지 않다.
마젠중은 5월 27일 중국으로 떠나면서 김홍집에게 태극팔괘도를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고 이것을 청나라 정부에 보고하겠다하고 떠났다. 그런데 마젠중이 이로부터 3개월 뒤인 1882년 8월 10일에 조선으로 돌아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하였을리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1882년 5월 22일(음력 4월 6일) 조미통상조약을 마치고 마젠중이 연회를 베풀며 김홍집에게 ‘운청홍룡기’를 제안하였던 당시 일어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국기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김홍집이 고종에게 마젠중의 말을 보고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조미통상조약을 성사시킨판에 조선을 중국의 속국취급하는 말을 들은 고종이 가만 있을리 없다. 그래서 이 일로 인해 고종은 국기 제작에 관한 명을 내렸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당시에 고종의 측근에서 태극기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슈펠트 제독이 미국으로 가져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당시 김홍집이 마젠중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홍색의 바탕에 청색과 흰색을 합성한 원’을 제안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첫 번째는 고종이 태극기 제작에 관한 사실을 김홍집에게 지시하지 않았을 경우이고, 두 번째는 김홍집이 마젠중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다른 말로 회유했을 경우이다. 당시 고종이 태극기에 관해 깊이 논의 한 대상자는 다름아닌 김홍집이었으므로 두 번째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종이 그린 태극기를 슈펠트 제독에게 전달한 사람 역시 김홍집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박영효가 일본 수신사로 파견될 때 고종은 은밀히 박영효에게 태극기 제작에 관해 일러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고종은 태극기가 조선의 국기임을 공식적으로 공포하고 전국에 이 국기를 사용토록 공식적으로 선포하게 된다.
고종은 1886년부터 4년동안 외교 고문으로 활동했던 미국의 오웬 니커슨 데니(Owen Nickerson Denny, 1838∼1900)에게 직접 대형 태극기를 하사한 일이 있다. 그 크기는 자그마치 가로 262cm, 세로 182.5cm에 달하는 크기로 옛 태극기 가운데 가장 크다. 데니는 1890년 5월 복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이것을 지니고 돌아갔다. 1900년 데니가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나자 가족이 간직하고 있다가 이를 기증받은 윌리엄 롤스턴이 1981년 6월 23일 우리나라에 기증하면서 돌아오게 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 최초 태극기 사용 시기
태극기(太極旗)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앞서 살펴본대로 이응준이 제작한 태극기는 4괘가 없는 흰 바탕에 청홍 태극문양만 그려진 태극기로 짐작된다. 현재 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아 분명치 않다.
이 수호조약에 참여한 미국의 전권특사 슈펠트가 미국으로 가면서 가져간 태극기 그림이 현재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지만 실제 사용된 바는 없다.
이 태극기 그림은 《해상 국가들의 깃발(Flags of Maritime Nations)》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미국 서적에 실려있다.

《Flags of Maritime Nations(해상 국가들의 깃발)》 1882년 미 해군성이 발간했다.(교원대 교육박물관 제공). 1882년 9월에 박영효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태극기보다 3개월 이상 앞선 태극기.
따라서 정식으로 사용된 태극기는 1882년 9월 25일 일본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에 의해서이다. 박영효는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의 뒷수습을 위해 같은 해 8월부터 11월까지 수신사(修信使) 대표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는 일본으로 가기 전 부터 국기 제작에 대한 고종의 명을 받아 일본으로 가는 메이지마루(明治丸) 배안에서 국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베에 도착하여 숙소 건물에 게양하였다는 태극기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일본 외무성 관원이 주일 영국 공사에게 보낸 문서에 태극기 그림이 남아 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문서에 실려있는 태극기(박영효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 태극기 원형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가서 체류하고 있으면서 각국 공사(公使)에게 태극기를 배포하였다는 점에서 이 태극기를 박영효가 만든 태극기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실존하는 태극기 중 최초의 태극기는 1884년에 제작된 ‘쥬이 태극기이다.

쥬이 태극기, 1884년 제작.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및 사진제공
1883년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가 조선에 왔을 때 수행하였던 미국인 쥬이(Pierre Louis Jouy)가 1884년에 입수하여 미국으로 가져간 것이다.
그다음은 1890년 제작된 ’데니 태극기‘이다.

가로 262㎝, 세로 182.5cm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옛 태극기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다. 당시 서양 국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참조하여 제작하였으며, 손바느질이 아닌 상하 90cm 정도 크기의 넓은 폭의 면직물을 바탕 재료로 하여 재봉틀을 사용해 박음질했다. 이것은 당시 고종황제의 명에 의해 제작되었으므로 당시 고종황제의 생각이 반영되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영어: Empire of Korea),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1882년부터 사용하던 태극기(太極旗)를 대한제국의 국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국호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이후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이때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국기는 대한제국의 국기를 그대로 계승하여 ‘태극기’로 하였다. 이후 태극기는 대한민국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고, 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태극기는 정식으로 대한민국의 국기로 재정되었다.
3. 대한민국 태극기 제작에 대한 통일안 제정
1882년 당시에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태극기는 중앙에 청홍(靑紅) 태극문양을 두고 네 모퉁이에 4괘를 배치하는 것을 동일하였으나, 태극의 방향과 4괘의 배치 등은 통일된 규정이 없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때도 일정한 규격은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통일성 없이 여러 종류의 태극기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1948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대통령의 ‘국기시정통일지시’에 따라 ‘국기시정위원회’가 구성되어 3월 25일 당시 위원회에 상정된 5개의 도안 중 현행 태극기를 채택하기로 의결하였다.
※ 당시 5가지 국기도안 중 제 3안이 선정되었다.
① 제1안 구왕궁 소장안
② 제2안 군정문교부안
③ 제3안 우리국기 보양회안
④ 제4안 이정혁 건설안
⑤ 제5안 독립문 의거안
3월 26일 회의에서는 국기의 깃봉도 과거 사용하던 연꽃 봉우리 대신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 봉오리로 정하고 색깔은 금색으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국기시정위원회의 연구결론 보고서가 국무회의에 제출되었고, 국무회의에서 이를 접수하여 문교부에 서는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서 국기 제작법을 공포하였다. 1950년 1월 25일에는 문교부 개정고시 제3호로 국기의 종류와 규격을 제정하여 보완하였다.
이로써 종래 통일성이 없이 여러 종류가 혼용되어 오던 태극기는 확고한 도안과 규칙을 갖추어 통일되고 정확한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확정된 태극기는 붉은색을 양(陽)으로 하고, 푸른색을 음(陰)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붉은색을 상부, 푸른색을 하부로 하였으며, 태극의 회전방향은 반시계방향으로 하였다(해시계 푯대를 오전에 외부, 오후에 중앙에 두게 되면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게 됨).
지금의 태극기 도안이 되기까지에는 42인의 국기시정위원회의 수차례 의논과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결정되었다. 당시 이왕에 해방과 함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였으니 국기도 새로운 도안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는 논란이 가장 두드러졌으나, 일제 36년 동안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애국지사들이 태극기를 가슴에 묻고 조국의 광복을 빌었으니 그분들의 넋을 달래고, 또 갈라진 남북이 통일되면 한반도 전체의 의견이 수렴된 국기를 만들 기회가 있으니 도안과 4괘의 이치가 다소 논란이 있더라도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가장 많이 그려지고 사랑하였던 현재의 태극 도안대로 국기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국기 깃봉은 아랫 부분에 꽃받침이 5편이 있는 둥근 모양에 가까운 무궁화 봉오리 모양으로 하되, 그 색은 황금색으로 결정하였다.

